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갈리아 전쟁 (문단 편집) === 그 후 === 이로써 벨가이인들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로마 최고의 부자이자 제1차 삼두정치의 일원이었던 크라수스의 차남이었다.]를 보내 갈리아의 대서양 연안 부족들을 항복시키도록 했는데, 벨가이인들이 패퇴했다는 소식을 들은 갈리아족은 순순히 로마에 항복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갈리아가 완전히 평정되었다고 생각했고 이는 원로원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원로원은 무려 15일 동안의 감사제를 지냈는데 이는 폼페이우스가 동방 원정을 마무리 짓고 개최한 12일 동안의 감사제를 능가하는 규모였다. 당시 로마에서는 호민관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의 폭주가 심해졌는데 그는 로마 시민에 대한 곡물 무상 배급을 실시했고, 폭력단을 조직해 원로원과 유력 정치가를 협박했으며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집회에 돌격하여 훼방을 놓는 등[* 이는 히틀러의 돌격대(SA)를 연상시킨다. 당시 로마 공화국의 수도 내에는 무장집단을 두는 것이 불법이었으므로, 경찰 같은 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클로디우스 휘하 폭력단의 전횡을 제지하기 어려웠다.] 난동을 벌였다. 이에 대응하여 원로원 측도 호민관 밀로를 움직여 같은 폭력단을 조직해 대응하게 했다. 그 결과 로마 시내에선 양대 폭력단의 패싸움이 비일비재했고 클로디우스와 밀로는 서로 고소를 남발했다. 원로원 의원들 중 '''[[옵티마테스]]'''파는 클로디우스의 전횡으로 그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슬쩍 클로디우스에 의해 추방당한 키케로를 불러들이려고 했다. 폼페이우스는 키케로의 복귀를 지지함으로써 정계를 주도하는 모습을 보였고 키케로의 귀국은 쉽게 가결되었다. 그 뒤 원로원 의원들은 키케로 문제에 협조한 폼페이우스에게 감사의 뜻과 동시에 그에게 곡물 배급을 담당하는 임무를 수여했는데 이는 지중해의 해군을 거느리는 권한을 갖게 한 것이었다. 또한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해 카이사르와 떼어놓으려는 속셈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